돌아온 탕자비유-탕자/큰 아들/아버지, 3자의 관계

돌아온 탕자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탕자비유(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많은 성화를 그린 램브란트는 어떤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바라봤는지를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살펴봅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

탕자의 비유 썸네일
돌아온 탕자 이야기인 탕자의 비유 속 등장 인물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뜻을 알아봅니다.

1. 돌아온 탕자 이야기 (탕자비유)

1.1  누가복음 15장 11~32절 비유

『신약성서』의 『누가복음』(15:11~32)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사람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받아 먼 객지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모두 탕진하고는  결국 비참한 돼지치기로 전락했습니다. 아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께도 돌아가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아들을 반갑게 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큰 아들은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으나  아버지는 “너는 언제나 옆에 있어서,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로, 죄 있는 자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에 의해서 구원된다고 하셨습니다.

인자한 아버지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하나님)이시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죽기 직전에 용기를 내서 돌아온 아들은 죄 많은 인간 (세리와 죄인들)이며 큰 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은 먼저 그가 죄를 지었음을 인지하고 회개해야 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 끝이 없는 긍휼과 은총의 무한함을 상징합니다.

1.2 세 가지 비유 중 하나

예수님은 구속에 대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
둘째가 잃어버린 주화 비유
셋째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2. 관련 성경 구절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 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고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Bring the fattened calf and kill it. 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 (공동번역성서)

3.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

램브란트는 그가 죽기 1년 전에 이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는 탕자의 귀향에 대해 소묘, 에칭 등의 기법으로 몇 가지 그림을 그렸습니다만 나이 들어 그가 해석한 탕자 이야기를 유화 그림에 담았습니다.

이 걸작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가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를 알아내어 이 이야기의 보편성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8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소장-탕자비유를 그린 그림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8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소장

3.1 유화 그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화 그림입니다.
크기는 264.2 x 205.1cm이며 1668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폭격할 당시, 4년 동안 (1941~1945년) 우랄산맥 소금 광산에 비밀리에 옮겨져 있었습니다.
전 세계 그림 가운데 도달할 수 없는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걸작입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가 내 준 옷을 입고 가락지를 이미 끼고 있었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화가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큰 형이 아버지와 함께 그를 맞이한 것으로 그렸습니다. 화가는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모든 상황을 한 장의 그림에서 나타내 그의  관점을 그림에 나타내고자 합니다.

램브란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아내 사스키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대부분 1년이 못되어 죽었고 램브란트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아 주문이 줄어들었음에도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스키아는 네 번째 태어난 아들 티투스가 돌도 되지 않았을 때인 164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헨드리케라는 여인을 만나지만 결혼을 하지 못하고 1663년에 그녀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티투스도 27세의 나이로 1668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행 속에서 램브란트는 ‘탕자의 귀환’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죽기 전에 그린 또 다른 그림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시므온’입니다.

3.2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

램브란트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 / 1636년 / 유화
램브란트,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 1636년, 유화

램브란트가 1636년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라는 유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 속의 탕자는 술집 접대부를 무릎에 앉히고 술잔을 높이 들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황금색 손잡이의 큰 칼을 차고 치장한 모자를 쓰고 있으며 화려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탕자는 램브란트 자신을 모델로 했으며 접대부는 자신의 아내인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렸다고 합니다. 

램브란트는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와 1635년에 결혼을 했고 사스키아가 3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 때 죽었고 1641년에 낳은 아들 티투스만 죽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스키아가 1642년에 30세의 나이에 죽은 후에 아들의 보모였던 헤르트헤와 혼인 불이행으로 소송까지 가서 별거 수당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자신의 하녀로 일하던 헨드리케와 딸까지 낳았습니다.
그 후 빚과 명예 실추로 인해 램브란트는 1656년 (50세)에 파산 선고를 받았고, 딸을 낳은 헨드리케가 페스트로 1663년에 떠났고 아들 티투스도 결핵으로 1668년에 27세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램브란트는  파산선고 후 시외곽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  쓸쓸하게 혼자 1669년에 63세로 죽었습니다.

1636년도는 램브란트가 막 결혼을 한 때이므로 자신을 탕자로 인지하고 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램브란트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1668년에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이 ‘탕자의 귀환’으로 자신이 탕자임을 고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을 탕자이며 죄인으로 그린 이 그림으로 램브란트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램브란트는 청년 시절에 고약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례함, 자만, 낭비벽, 거만함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3 돼지와  함께 있는 작은 아들

램브란트는 돼지와 함께 있는 비참한 작은 아들을 그렸습니다.

램브란트 돼지 속에 함께 있는 탕자 1645-1648년 / 드로잉 16x23cm
램브란트, ‘돼지 속에 함께 있는 탕자’ 1645-1648년, 드로잉, 16x23cm

3.4  에칭으로 그린 탕자의 귀향

램브란트가 에칭 기법으로 그린 탕자의 귀향입니다.
아버지 뒤에서 하인이 옷과 신발을 들고 서 있습니다.
이 장면은 아들의 비참함이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도  집 계단에서 급히 아들을 맞아 안고 있습니다.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 1636년 16x14cm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 에칭, 1636년, 16x14cm

3.5 펜과 붓으로 그린 그림

아들을 황급히 무릎을 굽혀 안으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집 문 앞에서 이제 막 만난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펜과 붓으로 그린 드로인 1642년/19x23cm
램브란트, ‘탕자의 귀환’, 펜과 붓으로 그린 드로잉, 1642년, 19x23cm

3.6 탕자의 귀환 그림 속의 아버지

램브란트가 그린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안아 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안기 위해 허리를 조금 숙인 상태이며 아래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입은 약간 벌어져 있고 두 손으로 아들의 등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이 자세를 그려 램브란트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과 용서, 아버지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표현하려 한 듯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오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려고 한 송아지를 점찍어 둔 듯합니다. 작은 아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알고 미리 정해  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3)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Bring the fattened calf and kill it. 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the]를 붙여 정해진 송아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밖으로 나와 자신에게 불평을 하는 큰 아들도 달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우리가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누가복음 15:31~32)  
늘 함께 있어 줘서 고맙고, 내 재산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죄를 짓더라도 자신을 깨고 낮은 마음으로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서로 다른 두 손

램브란트는 아버지의 오른손과 왼 손을 다르게 그렸습니다.
왼 손은 남자의 손으로, 오른손은 섬세한 손으로 그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사랑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정의, 공의, 질서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랑이라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올바르게 키우고 가르치려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잘못할 때는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손 부분 그림 확대
아버지의 손 부분

아버지의 표정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남루한 차림을 보고는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금방 알아챘을 겁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는 작은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버지의 시선은 어디를 바라보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른쪽 눈이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으로 눈동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수염도 손질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작은 아들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얼굴과 눈 부분 그림을 확대함.
아버지의 얼굴과 눈 부분

3.7 탕자의 형

램브란트 유화 속의 형은 밭에서 돌아온 형의 모습은 아니며  화려한 옷차림을 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유대인 장자는 그가 받을 몫이 있습니다. 다른 아들에 비해 2배를 받게 됩니다. 장자로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많으니 형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으로 그렸다고 판단됩니다.

그의 표정은 입술을 굳게 다문 불만족한 모습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다는 것, 자신이 한 것만 내세우며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효도를 다하고 규율을 잘 지키며 사는 착한 아들로 보였지만 큰아들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작은 아들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나 형은 꼿꼿이 서서 동생에게 다가가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여인은 작은 아들의 어머니로 보이며 그림 왼쪽 위쪽에 거의 보이지 않게 그린 여인은 형의 아내이자 작은 아들의 형수로 판단됩니다.
어둠 속에 서 있으며 거의 보이지 않게 그린 것으로 봐서 작은 아들을 반기지 않는 것으로 표현하려 한 듯합니다.

형의 두 손을 그린 색깔이 다릅니다.
어두운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 쥐고 있습니다.  이 또한 램브란트가 의도한 색깔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형의 마음 상태가 한편으로는 돌아온 동생을 반기지만 다른 한 편은 창녀에게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큰 형은 회개를 하지 않는 의인,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합니다.
형은 아버지와는 달리 사랑과 은혜보다는 율법, 공덕과 보상을 생각하는 아들로 묘사됩니다.

형의 손 부분과 다른 사람 얼굴 부분 혹대/형의 두 손의 색깔이 다릅니다.
형의 손 부분과 다른 사람 얼굴 부분, 형의 두 손의 색깔이 다릅니다.

3.8 검은 모자를 쓴 다른 사람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서 아마 작은 아들의 또 다른 형제가 아닌가 생각되나 성경에 “두 아들”이라고 했으니 아들은 아니고 집안에서 주인인 아버지를 도우는 집사쯤 되는 인물인 듯합니다.
그는 방관자 입장에서 아버지와 작은 아들을 앉아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3.9 작은 아들의 두 발과 입은 옷과 칼

왼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고 상처 투성이이며 오른발에는 낡은 신발이 신겨져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는 작은 아들은 모두 맨 발로 그려 있으나 램브란트 그림에서는 그래도 낡은 신발이지만 신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신발은 말씀으로 해석되며 자신과 세상을 구분하는 도구로도 표현되기도 합니다.
작은 아들은 한 발은 세상에 깊숙이 발을 딛고 있었고, 이제 돌아와 한 쪽은 아버지 쪽에 낡은 신발이나마 딛고 서려하는 걸 상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탕자의 발 부분 확대/왼쪽 발에는 상처가 나 있습니다.
탕자의 발 부분, 왼쪽 발에는 상처가 나 있습니다.


옷은 남루하고 그의 얼굴을 아버지께 기대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오른쪽에 칼을 차고 있습니다.
이 칼은 당시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에서 받은 모든 재산을 모두 탕진했지만 이 칼만은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출처 : 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2019년 4월 3일)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1277

돌아온 탕자가 칼을 차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칼을 차고 있습니다.

4. 헨리 나우엔의 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엔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 앞에서 1주일 동안 앉아서 감상한 후 책을 한 권 썼습니다.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득 의구심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고, 이해하며, 사랑하려고 애쓰시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걸까요?
그것을 알고는 있었던 걸까요?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찾으시도록 나를 드러낼 것인가?” 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아실 수 있도록 나를 보여드릴 것인가?” 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입니다.
하나님은 혹시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아득히 먼 곳을 뚫어지게 살피십시다. 하루빨리 찾아 집에 데려가시려는 뜻입니다.
 (p.191)

◈헨리 나우엔이 쓴 “탕자의 귀향”에 대한 [북리뷰] 쉼 없이 아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베리타스)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https://veritas.kr/news/18527

5. 무리요의 돌아온 탕자

무리요 그림에서는 돌아온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라는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옷을 들고 있는 종과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가 등장하며 송아지를 잡으러 가는 종과 그의 아들이 보이며 아버지 등 뒤쪽에는 항의하는 큰 아들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도 보입니다.

무리요 돌아온 탕자 /1667-1670년 사이에 제작
무리요, ‘돌아온 탕자’, 1667-1670년 사이에 제작

강아지는 탕자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그가 지금 환영받을 상황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자기가 아는 주인이 돌아온 것만 반가워합니다.

오른쪽에는 한 종은 옷을, 또 한 종은 가락지를 들고 서 있으며 큰 형으로 보이는 남자는 어둠 속에서 동생을 바라보고 있고 형수로 보이는 여자도 아버지의 뒤에서 끌려가는 송아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를 잡으러 가는 종은 도끼를 어깨에 메고 있고 그의 아들은 웃으며 소를 끌고 있습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있고 인자한 아버지는 그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6. 우리들의 모습, 탕자와 큰 아들

작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큰 아들도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었으므로 두 아들 다 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맞아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며 잔치를 베푼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므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사람들을 구분했던 사람들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우리들을 상징하는 존재들입니다.
철없이 살아 있는 아버지께 자신의 몫을 나누어 달라고 해서는 받은 재물을 모두 탕진한 작은 아들은 너무 뻔뻔하고 당돌하며,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며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고 자신의 삶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우리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아들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큰 사랑으로 용서하고 안아 주십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작은 아들을 찾기 위해 큰 아들을 두고 멀리 나가시지 않은 것은 작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7. 탕부(蕩父) 하나님

목회자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 (The Prodigal Go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생소한 영단어 ‘prodigal(프러디걸)’은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남김없이 다 써 버리는’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그 뜻을 소개하면서 “이 단어는 비유 속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리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응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蕩父)'”라고 말한다. (출처 : 탕자의 비유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탕부 하나님’, 크리스천투데이 2016년 10월 23일)

8. 돌아온 탕자, 다른 그림들

8.1 작가 미상

작가 미상 돌아온 탕자
작가 미상, ‘돌아온 탕자’

8.2 니콜라이 로세브

니콜라이 로세브 돌아온 탕자 그림
니콜라이 로세브, ‘돌아온 탕자’

8.3 폼페오 파토니 1773

폼페오 바토니 돌아온 탕자 1773년
폼페오 바토니, ‘돌아온 탕자’ 1773년

8.4 제임스 티소트 

제임스 티소트 탕자의 귀향/ 브루클린 박물관
제임스 티소트, ‘탕자의 귀향’, 브루클린 박물관

8.5 한스 세발드 베함

돼지치는 사람으로 조각된 탕자 1538년 (출처-위키백과)
돼지치는 사람으로 조각된 탕자 1538년(출처-위키백과)

9. 함께 보시면 좋을 글들

아래글을 같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BC702년경)-그는 좋은 왕인가?

불의한 청지기 비유 바로 이해하기 (누가복음 16장 1-1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 어린 양을 먹여라.(요한복음 21장)-헬라어 사랑하다/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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